인간사랑과 생명존중을 실천합니다.
24시간 생명의 불씨를 지키는 의사
응급의학과 양희범 교수
어둠이 짙어지는 새벽 2시. 이 시각 위급한 환자들이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의지하는 곳은 365일 불을 밝히고 있는 병원 응급센터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의료진에게 마(魔)의 시간은 이 시간이다. 자정부터 취객이나 사고로 실려 오는 환자들로 응급실이 북새통을 이루기 때문. 의식이 없는 환자는 물론, 고통을 호소하거나 욕설을 내뱉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응급실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을지대학교 을지병원 응급의학과 의료진은 모두가 그렇지만, 그 중 양희범 교수는 단골손님(?)도 있는 응급실 베테랑이다.
환자의 기억에 남지 않은 의사
1분 1초가 숨가쁘게 움직이는 응급센터에서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은 하나같이 간절하다. 이렇게 간절한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의료진은 의식이 없는 등 생명이 위중한 환자를 우선으로 진료해야 한다. 때문에 진료를 하고도 ‘좋은 소리’를 듣긴 쉽지 않다.
“응급실에 올 정도면 환자와 보호자는 정말 급해서 오신 걸 거예요. 그래서 되도록 빠르게, 순서대로 진료해드리곤 있지만, 응급진료 절차를 준수해야 합니다.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선 불만이실 수 있지만 생사(生死)를 오가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이해해주시길 바랄 뿐이죠.”
급한 처치가 끝나고 입원이 필요한 환자는 해당 진료과로 전과(진료과를 이동)해 추가 진료를 받게 된다. 때문에 응급의학과 의료진은 환자의 기억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하지만 양 교수는 ‘기억에 남지 않는 의사’여도 좋단다.
“응급실 분위기처럼 환자와 보호자분들도 경황이 없으세요. 그래서 응급실 상황보다는 전과 후 주치의 선생님 진료가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을 겁니다. 기억에 남지 못해도 응급환자에게 안정을 찾아주는 것만큼 뿌듯한 일은 없죠.”
이런 양 교수에게 몇 년 전까지는 단골손님(?)도 있었다. 아흔을 바라보는 지긋한 연세의 김선영 씨(가명)는 안부인사를 묻듯 응급실을 찾아오곤 했다. 만성 호흡기질환을 가진 김씨 할머니의 방문은 반갑기도 했지만 양 교수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고. 요즘은 보호자와 함께 외래 진료를 받고 계시다고 김씨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는 양 교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24시간이 모자라’
양 교수는 근무시간 외에도 혹시 모를 응급상황을 대비해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병원에 ‘살다시피’ 지내는 양 교수는 불편하지 않냐는 물음에 유쾌하게 답했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지만, 진료 외 교육업무에도 매진할 수 있어 좋아요. 불편한 점은 가족들을 못 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과 제가 ‘패션 테러리스트’가 됐다는 정도네요.”
병원에서 24시간 이상 머물러도 양 교수는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환자 안전과 후학을 양성을 위해 소생의학, 독성학, 환경의학, 재난의학 등 응급의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을지대학교 의과대학 1회 졸업생인 그에게 ‘후학양성’의 뜻은 남다르다. 1등으로 인턴을 수료했던 양 교수는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24시간 환자는 많고 일손은 부족한 응급의학과를 지원했다. 서로에게 의지하던 동기들과 “우리가 을지의 역사를 만들자”는 다짐이 그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그 다짐은 보건복지부 응급의료기관 평가 ‘최우수 의료기관’으로 선정되기까지 이어졌고, 지금은 또 다른 다짐을 새기고 있다.
“개인적으로 의대생과 전공의, 응급구조사 교육에 관심이 많습니다.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하는데, 먹고살기도 바쁜 요즘은 간과하기 쉽죠. 그래서 저는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다 교육이 가능한 교육센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저 혼자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심장협회(AHA)에서 인증한 BLS(Basic Life Support), 대한심폐소생협회에서 인증한 KALS(Korean Advanced Life Support), 전미응급구조사협회(NAEMT)에서 인증한 PHTLS(Prehospital Trauma Life Support), TCCC(Tactical Combat Casualty Care) 등의 전임강사 자격도 취득했습니다.”
환자 곁에 있으면 아직도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양 교수. 묵묵히 헌신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양 교수의 바람처럼 그에게 병원 응급실만큼 어울리는 장소가 또 있을까. 오늘도 숨 가쁘게 뛰어다니며 흘리는 그의 구슬땀이 생명의 불씨를 지키는 작은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